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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전문 한국 근대사로 들어가는 영화적 입구, 임권택
    • 부제목
    • 작성자 영상축제 관리자
    • 등록일 2019-09-23
    • 첨부파일 f66b7557cb4d431e85963d89065030a7.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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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을 말하는 것은 한국 근대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난 이십 세기, 그리고 우리들의 세기. 임권택은 두 개의 세기를 건너온 생존자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시아 변방의 작은 한반도는 지난 세기에 벌어진 모든 사건을 고스란히 통과해왔다. 근대의 테크놀로지를 먼저 장악한 제국주의의 나라들은 이 작은 한반도에서 무너져가는 왕조를 짓밟으면서 무자비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런 다음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임권택은 1934년 호남 저 아래 장성에서 태어났다. 한반도에서 언제 태어났느냐는 질문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개인의 의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역사. 한반도의 결정에 무관심한 세계의 역사. 임권택은 호남의 판소리와 서예와 풍미 깊은 음식들을 음미할 수 있는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해방은 그가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해방 직후 좌우 대립의 세월 한복판에서 일본에 유학 갔다 돌아온 친척들은 고향에 공산주의 사상을 알려주었다. 그의 부모님은 지리산에 따라 올라갔고, 빨치산이 되었지만 몸이 아파서 내려왔다. ‘빨갱이 집안’으로 몰린 집은 더 이상 숨을 쉬고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나이 열여덟에 임권택은 푼돈 몇 푼 들고 집을 떠났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에서 무작정 집을 떠난 어린 소년이 갈 수 있는 곳은 피난민들이 넘쳐나는 부산밖에 없었다. 거기서 굶지 않기 위해 지게를 들었다. 매일 밤 어깻죽지가 너무 아파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번 돈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 어린 나이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임권택은 수전증을 평생 안고 살았다. 휴전을 하자 알고 지내던 장사꾼들이 서울로 올라간다고 해서 따라 올라왔다. 그들이 무슨 생각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영화를 제작한다고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임권택은 그렇게 영화에 도착했다. 이승만 정권이 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작은 위로라도 얻으려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영화 진흥정책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먼 훗날 이야기이다. 임권택은 고통스럽게 증언했다. “영화 현장에 있으면 밥도 주고 잠도 잘 데가 있고 돈도 주잖아요. 나는 그때 그러면 된 거예요. 나보고 감독을 하라고 했을 때 무서웠어요. 영화가 흥행이 안 되면 다시 굶어야 하잖아요” 1962년의 일이다. 임권택은 스물아홉 살에 첫 번째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찍었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성공하였다.

 

여기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임권택이 첫 영화를 찍던 해에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박정희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다음 그 해 말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긴 독재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제5공화국은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으로 반공(反共)을 내세웠고 연좌제를 비롯한 수많은 감시의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박정희는 정적(政敵)들을 체포하고, 감금하고, 협박하고, 침묵시켰다. 남한에서 활동하는 지하의 간첩에 관한 이야기가 사회를 떠돌았고, 북한에서 훈련된 무장공비들이 여기저기 출몰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임권택은 창백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숨죽이고 살아가야만 했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위대한 시대였다. 신상옥,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이만희로 이어지는 이름들, 찬란한 스타들의 명단. 임권택은 그들 사이에서 그저 묵묵히 영화를 찍어나갔다. 때로는 성공했고, 때로는 간신히 개봉하였다.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름. 임권택은 그저 잠시 충무로에 머물다가 떠날 것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게 활동했다. 마치 출근하는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현장에 나갔고, 그리고 해가 지면 하숙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한국영화는 기울기 시작했다. 점점 더 민주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다음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무시무시한 검열이 시작되었다. 자본은 정부와 손을 잡았고, 통계를 정치적 선전으로 믿은 경제개발계획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동안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 속에 손목이 잘리고 폐를 망쳤다. 1971년 11월 13일, 청계천에서 노동자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다음 분신자살하였다. 그 해까지 임권택은 고작 십 년 동안 오십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때, 문득 영화감독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돌아보았다. 직업의 윤리가 내리는 명령. 그래도 하나쯤은 책임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을 처음 가졌다.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잡초>가 그 영화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외면했고, 비평가들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이 영화는 이제 그 프린트도 사라졌다. 임권택은 깊은 실망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한국영화는 늪 속으로 들어갔다. 오직 정부에 충성하는 영화, 반공영화와 새마을영화만이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관객들은 극장을 떠나가고 있었다. 임권택은 외화 수입 쿼터를 얻어내기 위해 버리듯이 찍는 한국영화를 그들이 원하는 시나리오로 찍어나갔다. 그 순종적인 태도. 그때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임권택이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을 정화시켜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시장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매번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에 대한 자신의 질문을 실행하였고 그 안에서 시행착오를 통과해나갔다. 임권택은 말 그대로 시행착오의 대가가 되어갔다. 아마도 <왕십리>는 그 신호탄이 되었을 것이다. 1975년의 일이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그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관련자 전원이 사형당한 그해. 임권택은 조심스럽지만 자기 안에서의 부단한 도약을 거듭하고 있었다.

 

<깃발 없는 기수>와 <짝코>를 찍었을 때 임권택은 자신의 트라우마와 대결할 준비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 세대. 그들이 보낸 청춘의 시간. 해방 직후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기자 허윤은 친구들조차 각자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의절하는 것을 바라본다. 회색지대에 놓여있던 허윤은 긴 고민과 회의 끝에 자기의 깃발을 들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영화는 단지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해방 직후의 일생생활의 디테일은 이미 임권택이 대가의 경지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폿집에 모여 앉아 막걸릿잔을 기울일 때 전력이 부족하여 깜빡거리는 전등은 종종 대화를 중단시킨다. 문득 끼어드는 암흑. 영화 전체를 내리누르는 피로. 그때 임권택의 카메라는 가깝지도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자리에서 일정한 거리, 그저 임권택의 거리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힘든 그 만큼의 거리에서 그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 그 인물들이 만난 사건을 바라본다. <짝코>에서 임권택은 더 깊이 밀고 들어갔다. 이제는 돌볼 이도 없는 노인들을 모아 관리하는 갱생원에 한 노인이 들어온다. 거기가 시작이다. 그리고 거기서 코가 짝코인 노인을 보더니 갑자기 달려들며 멱살을 붙잡고 고향에 가자고 소리친다. 송기열. 빨치산 토벌에 나선 경찰이었던 그는 특진이 걸려있던 짝코를 체포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만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놓친다. 백공산. 별명이 짝코인 이 남자는 빨치산이었던 경력을 숨기고 평생을 도망 다닌다. 송기열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한다고 짝코를 평생을 쫓아다닌다. 영화는 교차 편집을 통해 송기열과 짝코 사이를 오가면서 한 편으로는 갱생원에서 그들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 그저 둘로 나뉘어 쫓고 쫓겼던 두 남자의 보잘것없는 삶이 그렇게 탕진되었음을 보여줄 뿐이다. 시종일관 어느 한순간도 남김없이 비애의 감정으로 가득 찬 시간들. 임 권택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런 목표 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여기서 임권택은 덧없는 삶 을 보내버린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거의 필사 적이 된다. 정치의 놀음에 휘둘린 것은 알겠다. 그런데 그 때 그 놀음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 까. <짝코>의 마지막 장면은 이제부터 가야 할 임권택의 영화를 갑자기 펼친다. 송기열은 짝코를 잡아 이끌고 기 차를 태워 고향으로 향한다. 하지만 짝코는 송기열에 기 대서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둔다. 고향으로 가 는 길. 그런데 고향은 다가갈수록 점점 멀어진다. 마치 가 볼 수 없는 곳이기 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더 멀어진다. < 짝코>는 임권택이 결국에는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영화이다. 그런데 그 길은 그렇게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일직선을 그으면서 자기의 결론을 향해 밀고 나아가지 않았다. 임권택은 한 걸음을 나아가면 혹 시나 너무 빠른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두 걸음을 뒤 로 물러난다. 언제나 그러했다. 임권택이 아무도 눈치채 지 못하게 그렇게 밀고 나아가고 있을 때 그걸 사람들이 알 수밖에 없는 순간은 <만다라>를 만들었을 때 찾아왔 다. 두 명의 승려. 법운은 자기의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 달음을 얻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한겨울 만행을 하는 중 이다. 버스에서 우연히 또 한 명의 승려를 만난다. 얼핏 보면 파계승처럼 보이지만 지산은 세상 사람들, 그것도 저 밑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중생들 속에서 병 속의 새 를 꺼내야 한다고 믿는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두 개 의 길. 법운은 처음에는 지산을 경멸하지만, 점점 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연민으로 바뀌고 그가 가는 길이 자신 과 다르지만 지산은 또한 그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자기 의 길을 용맹정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를 존 경하게 된다. <만다라>는 길에서 시작해서 길에서 끝난 다. 눈 덮인 산사에서 서울역 앞 유곽에 이르고, 추운 겨 울 바닷가에서 이름 모를 시골길 봄날의 나무들이 화사 하게 피어나는 언덕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만행 길 에서 두 사람은 번뇌와 돈오(頓悟)에 대해서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그게 영화의 전부이다. 풍경들. 그때 이 영화를 촬영한 정일성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게 찍었다. 그는 눈 이 내리면 녹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연꽃은 더러운 연못에서 자기의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거기에 부처님 의 가르침이 있지 않았던가. 임권택은 <만다라>가 기다 림의 과정에 관한 영화라는 걸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다시 되돌아왔다. 고향으로 가는 길. 그런데 거기서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 길소뜸>은 그가 만든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차갑고 매 정한 영화이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KBS 한국방송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생방송 중계하였다. 453시간 45분 동안 쉬지 않고 이어 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송국 스튜디오를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미처 카메라 앞에 서지 못 한 더 많은 사람들은 여의도 광장에서 자신의 이름과 가 족과 헤어진 장소를 쓴 팻말을 들고 하루 종일 거기 서 있었다. 부모들은 그걸 보고 울었고, 자식들은 그걸 보고 울고 있는 부모를 보고 울었다. 보고 싶은 사람. 고향. 그 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통일이 내일 찾아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영화는 1984년에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이 제야 제시간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길소뜸, 이라는 가상의 마을, 여기서 동진과 화영은 처음 만난다. 아직 어 린 둘은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난데없는 한국전 쟁이 그 둘을 갈라놓는다. 임신을 한 화영은 혼자 아이를 낳고 그만 그 아이를 잃는다. 동진은 피난에서 돌아와 내 내 화영을 수소문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그리고 여의 도 광장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난다. 영화는 절반 내 내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플래시백으로 두 사람 사이 의 지나간 시간을 오간다. 임권택은 여기까지 그리움에 가득 차서 찍었다. 거의 정확하게 절반, 두 사람은 강원도 어딘가에서 강가에서 시체를 건져내면서 하루 벌어, 먹 고 산다는 석철이라는 사내가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이 야기에 함께 만나러 간다. 그 여행은 환멸의 시간이 된다. 세 명은 그렇게 헤어진다. 아마 세 사람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고향은 어디에 있는 것일 까. 그저 그곳은 마음속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것일까.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있을 텐데 그곳이 어디일까.

 

이 무서운 영화를 끝내고 나서 임권택은 그저 고향을 바 라보고만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 란다. 영화 안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결론이 났다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임권택은 다만 여기서 현 실과 마주 대했을 뿐이다. <길소뜸>은 한 가지를 분명하 게 했다. 그는 더 이상 헛된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집요하게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을 다시 모색하 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길을 바로 나서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임권택은 아주 커다란 원의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가장 멀 리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씨받이>는 그 분 명한 발걸음이다. 아마도 당신이 이 영화만을 보았다면 이 말이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마치 하나의 계보를 만들어나가듯이, 그래서 연표를 작성하는 대신 마치 지 층을 탐사하는 것처럼 따라간다면, 거기서 켜켜이 쌓여 가는 방식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거기서 무엇과 마 주하게 될 것인가. <씨받이>는 우리로 하여금 유교와 대 하게 이끈다. 한국영화는 해방 이후 유교를 마치 쳐부숴 야 할 대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근대의 편에 서서 공격하 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경멸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무 엇을 잃었는가. 대답은 간단치 않다. 시간의 지층은 일시 에 무너져 내렸고, 종종 텅 빈 채로 우리들의 지식은 구 멍 뚫린 동굴이 되어갔다. 여기저기 나타난 동굴들. 그걸 서방세계의 근대의 지식 담론으로 메우려 애를 쓸 때 우 리들을 여기에 이르게 한 조건, 환경. 체계, 기회, 아니 우 리들, 이라고 부르는 호명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층 저 밑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누 구의 목소리인가. 아버지의 목소리. 어머니의 속삭임. 임 권택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한다. <씨받이>는 그 제목과 달리 여기서 다루는 것은 문중 제례인 유교의 제 사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다스리던 시대. 하지만 생명은 그때 어디에 있었을까. 양반은 단지 가문을 잇기 위해서 자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내 제사를 치러줄 것 인가. 그것이 이어질 때만 가문은 법을 따르고 이치에 맞 을 것이다. 법과 도리는 그 모든 것에 상위입법하여 사람 을 거느렸다. 임권택은 거기서 어떤 입장을 내세우는 것 이 아니다. <씨받이>는 유교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영 화이다. 그 절차는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그 과정은 기 품이 있으며 그 안에 예의를 담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절차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잔인하고 무정하게 진행된 다. 그건 누구도 멈출 수가 없다. 단지 가진 것 없는 ‘쌍것’ 이 따라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권력을 쥔 양반들도 그 앞에서 어떤 저항도 해서는 안 된다. <씨받이>의 마지막 장면은 엄정하고 어떤 흐트러짐 없이 무자비하게 진행된 다. 아이를 낳은 씨받이는 몸도 추스르지 못한 채, 자기가 낳은 아이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한밤중에 쫓겨나듯 그 집을 나선다. 안채의 열린 방문으로 아이를 낳기 위해 자 신과 운우지정을 나누었던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 만 그 남자는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씨받이는 그 남자를 한 번 불러 보지도 못하 고 떠나야만 한다. 임권택은 그 장면을 어떤 감정도 없는 작별로 만든다. 유교라는 지식. 지식의 명령. 잔인하고 아 름다운 명령.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그것이 고향으로 돌 아가는 길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나는 반복해서 말하겠 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분들이 살았던 세상. 그 세상의 끝자락. 거기서 임권택은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다. 조선이라는 시대. 그 시간에는 어떤 종류의 지식이 형식적 조건으로 항상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을까.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문제. 누구라도 순종해야 하는 규칙들과 명령. 그 안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어떻게 개별화되고, 또 그렇게 자기의 자리를 얻으려는 개인들은 다시 어떻게 귀속되었는가. 지식의 전술은 일상생활의 디테일 구석구석까지 파고들 었다. 각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해볼 수 있는 구석의 여백을 찾아서 거의 몸부림치듯이 해볼 수 있는 모든 것 을 해본다. <씨받이>에서 섹스는 에로틱한 몸짓이 아니 라 거의 몸부림에 가까운 저항이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자들의 명령에 따라 부서지거나 무릎 꿇어야 한다. 조선 이라는 하나의 문서 앞에서 해보는 가냘픈 저항과 그 안 에서의 무자비한 통합의 이 무한정한 반복. 어떤 가능성 도 없는 것일까.

 

임권택은 예상치 않은 대답을 찾았다. 이청준의 세 편으 로 이루어진 단편소설 중의 하나인 <서편제>는 하나의 길을 열어놓았다. 아마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지닌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마치 이청준의 소설은 오직 임권택을 위해서만 쓴 것처럼 그렇게 작동 하였다. 더 이상 아무도 판소리를 듣지 않은 시절에 접어 들었는데도 떠돌이 소리꾼 유봉은 서로 배다른 남매 송 화와 동호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떠돈다. 하지만 더 이상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동호는 그들 곁을 떠난다. 세월이 한참 흘러간 다음 동호는 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기회 가 닿을 때마다 송화를 찾아 나선다. 그러던 어느 소리꾼 을 만나 누이가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여기가 영화의 첫 장면이다. 임권택은 한 편으로는 그들 이 떠돌던 길을 따라가고, 또 한 편으로는 동호가 떠난 다 음 유봉과 송화의 유랑 길을 따라가고, 그러면서 다시 되 돌아 나와 누이를 찾으러 다니는 동호를 따라나선다.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플래시백 구조의 영화를 질서정연하 게 만든 것은 물론 대가의 솜씨이다. 그러면서 임권택은 고향의 자리에 누이를 가져다 놓고 거기서 고향이 자기 를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때 눈먼 누이는 누구인 가. 근대가 고향을 파괴하고, 삭제하고, 해체할 때 그것으 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누이는 불구가 된다. 불구가 된 전 통, 번쩍거리는 섬광과도 같은 근대로부터 자기를 방어 하기 위한 눈멂. 누이는 자기 몸의 일부를 부수면서 그 몸 으로 전통을 보존한다.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다른 도구 가 있던가. 그때 근대에 이끌려 떠나간 남동생은 누이를 찾기 위해, 고향에 되돌아오기 위해, 마음속의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리의 끈을 따라 되돌아오는 긴 여행길에 나선다. 고향은 거기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곳, 볼 수 없는 그곳, 하지만 고향의 소리는 부르고 또 부른다. 임권 택은 고향을 여기서 한(恨)의 정서로 다시 재 정식화 해 낸다. 거기에 담긴 그리움과 비애. 그때 소리는 고향의 알 레고리가 된다. 마지막 장면. 동호는 눈먼 누이를 만난다. 하지만 그렇게 그리워하던 누이를 만났는데도 아는 체하 지 않고 ‘심청전’ 한 대목을 청해 듣고 싶다고 할 뿐이다. 송화는 북채를 잡고 첫소리를 낼 때 그 사람이 기다리던 남동생이라는 것을 한 귀에 알아챈다. 하지만 아는 체하 지 않고 그 둘은 밤새 소리하고 장단 맞춘 다음 그냥 헤 어진다. 그 한은 그렇게 남겨져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소 리를 지켜주고, 고향을 지켜주고, 누이의 예술을 지켜주 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송화가 먼 길을 다시 떠날 때 명창 김소희의 ‘구음(口音)’이 길고 구슬프 게 끝 갈 데 없이 흐른다.

 

임권택의 진정한 결론은 그런 의미에서 <춘향뎐>이다. 조선시대로부터 세대로부터 세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온 마당.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야기. 남도의 소리. 거기에 담겨있는 한과 흥. 이제까지 ‘춘향전’을 찍은 영화 들은 원작소설을 어떻게 각색하느냐, 의 문제였다. (그리 고 산업은 누가 성춘향 배역을 연기할지가 관심이었다) 임권택은 여기서 전무후무한 결정을 내렸다. 소리를 찍 어볼 수는 없을까. 그건 더도 덜도 아닌 마음속의 고향을 담아볼 수는 없을까, 라는 간절한 소망이다. 하지만 임권 택이 선택한 예술은 영화라는 문법의 세계이다. 이 예술 은 서방세계에서 태어나 근대의 논리로 발전한 테크놀로 지의 기계 예술이다. 변증법과 총체성, 원근법과 기계의 운동. 그 안에서 판소리는 견딜 수 있을까. 반대로 판소리 라는 마당에서 영화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1975년 에 녹음한 명창 조상현의 ‘춘향전’ 소리 마당에서 가져온 대목들은 여기서 단순한 사운드 트랙이 아니다. 임권택 은 영화가 소리를 다쳐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소리를 다 친다는 말. 누군가는 이 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끝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말을 그 말 자 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이상한 동어반복 처럼 말하겠다. <춘향뎐>은 영화가 소리에 봉사하는 영 화이다. 하지만 이 말은 반대로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 왜 냐하면 <춘향뎐>은 임권택이 고향에 돌아오는 길을 찾 았음을 알리는 기쁨의 소리이며, 여기가 고향임을 알리 는 한바탕의 마당이며, 구구절절 모든 쇼트가 고향을 긍 정하는 표현의 다스림으로 시작하여 진양조를 거쳐 중머 리, 중중머리, 자진머리를 지나 휘머리에 이르는 리듬이 며 선율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한국영화가 경험해본 적 이 없는 아름다움. 그저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으면서 도 여기에 이른 고향으로 온 길이 눈앞에 있는 것 같으면 서도 저 멀리 손에 붙잡히지 않는 소리의 저편에 놓여있 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비애가 여기에 있다. <춘향뎐>은 임권택의 아흔여덟 번째 영화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왜 그다지도 멀었을까.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맨 처 음에 쓴 문장을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 임권택을 말 하는 것은 한국 근대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겠다. 임권택의 영화를 보는 것은 고향 을 잃어버린 우리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방법을 배우 는 것이다. 아마, 아마도 당신께서는 내 말에 이제는 동의 할 것이다.

 

 

영화평론가, 영화감독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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