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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은 임권택의 아흔여덟 번째 영화이다. 그리고 좀 더 소리 높여 말하고 싶어진다. 은 임권택 영화의 결론이자 그의 예술의 정수이다. 잘 알려진 대로 '춘 향전'은 조선 영정조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그 저 자를 알 수 없는 구비문학의 걸작이다. 처음에는 판소리로 시작하여 소설로 옮겨졌으며, 그 과정에서 120여 종에 달하는 원형 이판본(異板本)이 세대를 옮겨가는 과정에 나타나면서 '춘향전 군(群)'이라고 부를만한 이야기가 되 었다. 근대에 이르러 원각사 공연 이후 창극(唱劇)이 되 었고, 그런 다음 희곡을 거쳐 다시 영화화되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첫 번째 영화는 일제식민지 강점 하게 1923년 하야카와 고슈의 무성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춘향전' 이야기는 쉬지 않고 영화로 다시 제작되었다. 가장 유명한 '춘향전'은 신상옥이 최은 희를 춘향으로 한 과 홍성기가 김지미를 춘향 으로 한 이 1961년 같은 해 극장에서 흥행 대 결을 벌였을 때였다. 그런 다음 다시 '춘향전'은 텔레비전 드라마로 옮겨가 안방에서 다시 공중파를 타면서 또 만 들어졌다. 임권택의 은 영화로 만들어진 12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이미 우리가 본 '춘향전'을 되풀 이할 생각이 없다. 아마도 그 시작은 였을 것 이다. 여기서 판소리꾼 이야기를 찍은 임권택은 그때 처 음으로 판소리 '춘향전'의 완판본을 들어보았다고 고백 한다. 그리고 그때 받은 충격과 감동을 여러 자리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임권택은 아마도 그걸 듣고 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떠나온 고향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남도의 소리. 어린 시절 그 후로는 그만 잊을 줄 알았던 기억 저편의 그 소리.

 

임권택은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다. 영화가 판소리를 찍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것은 단지 이미지와 음악의 문제가 아니다. 두 예술은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했 으며, 서로 다른 문화 위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왔으며, 그 러면서 각자의 문법을 가졌고, 그리고 서로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도식적으로 말하겠다. 영화는 서양의 과학 기술의 과정 속에서 발명되었으며, 근대의 이성으로 쇼트의 체 계와 서사의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판소리는 한민족의 흥과 비애의 정감을 담아 소리의 고저장단이 되었고, 그걸 옮기면서 소리의 기량을 발전시켰으며, 그 안에서 위대 한 명창들이 다시 다듬고 또 보존하여 전승하였다. 그것을 한 자리로 불러 모았을 때 자칫하면 영화가 부서지거나 판소리가 그저 이야기 주변을 겉돌면서 웅성거릴지도 모른다. 임권택은 여기서 그 자신이 쌓은 거의 모든 기량을 다한다.

 

에서 사용한 판소리 판본은 조상현 명창이 1975년에 녹음한 소리이다. 여기서 구태여 '춘향전'의 줄 거리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도 알고 있는 이야기. 부모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알고 있는 이야기. 은 형식의 영화이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여기서 영화의 형식과 판소리의 형식은 서로 함께 한 몸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마주한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첫날 밤을 보낼 때 영화는 어떻게 '사랑가'를 껴안을 것인가. 이몽룡이 과거급제를 보러 떠날 때 나귀에 매달리는 성 춘향을 바라보면서 영화가 '이별가'를 감당할 수 있을까. '옥중가'는 또 어떤가. 그리고 '십장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다음 마지막에 자진모리장단에 맞춘 '어사 출두'에 이르면 영화와 판소리는 함께 절정에 이른다. 임권택은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나요, 라는 질문에 그저 겸손하게 나는 소리 위에 영화를 얹어놓았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이렇게 위험천만한 모 험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용기를 내서 말해보고 싶다. 한국영화는 결국 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춘 향전'을 찍었기 때문이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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