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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 이야기

[국내리포트]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 공개행사 현장 스케치 - 1주차

  •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3-11-26 조회수7086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 공개행사 현장 스케치

 

- 1주차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과 (사)무형유산진흥센터는10월 11일 부터 27일 까지 3주 동안 매주 금,토,일에 걸쳐 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 공개행사를 진행했다. 이번 합동 공개행사는 세계 최초 무형문화유산 복합문화공간인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에는 가야금산조 및 병창과 진주검무 등의 예능 분야를 포함하여, 유기장·옹기장·탕건장 등 16개 공예 분야를 진행하였다. 예향 전주의 높고 푸른 가을하늘과 함께 즐기는 무형유산 나들이를 나눠서 소개하겠다.

 

 

<무형원 전경>

 

 

   

●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궁시장이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활을 만드는 사람을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시장(矢匠)이라 한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활제작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기교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고구려 활의 형태는 벽화에서 볼 수 있는데, 현재 사용하는 국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한국의 전통 활은 이때부터 변함없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활을 만드는 재료로는 대나무, 뽕나무, 물소뿔, 소의 힘줄이 있는데, 한국의 활은 쇠뿔과 쇠심줄을 사용한 각궁(角弓)이란 점이 특징이며, 화살이 멀리 나가는 강궁(强弓)에 속한다.

 

◇ 보유자 : 김종국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인 김종국 선생은 1938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출생하였다.(호적상 출생년도는 1940년이다) 생계의 방편으로 친구의 소개를 통하여 1960년 5월부터 1962년까지 경남 마산시 추산동의 전방(箭房)에서 일을 하게 되어 이때부터 화살 제작업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고, 이곳에서 조명제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기술을 연마한 후에 1962년에 독립하여 경북 예천군 왕신리로 이사하고 독자적으로 전방을 열었다. 1978년 스승인 조명제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됨을 계기로 조명제 선생의 아들 조삼래 선생과 함께 궁시장 전수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 1979,84~6,92년도에 전승공예 장려상을 받았고 200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궁시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 전수생 : 김민철, 문형조

 

 

   

●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소목장은 건물의 창호나 장롱·궤·경대·책상·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기술을 말한다. 기록상으로 보면 목수는 신라때부터 있었고,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때부터로 전해진다. 조선 전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자급자족에 따른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제작도구로는 톱 종류와 대패·등밀이·장도리·송곳·놋줄 등이 주로 사용된다. 소목장은 무늬가 있는 나무로 자연스러운 미를 최대한 살린 한국 전통 목공예 기법으로 자연환경과 주택구조 등을 고려하여 한국적인 독특한 조형양식을 만들어 낸 민속공예사적 가치가 높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보유자 : 박명배
1950년 6월 12일에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기술 익히는 것을 권유했던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서울로 올라와 18세에 서라벌 예술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 공예학과 최회권 교수가 운영하는 공예미술연구소에 취직을 하면서 소목일을 접하였다. 공방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적성에 맞아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71년 허기행에게 전통 가구의 짜맞춤 기법을 배우고 소목일을 시작한지 13년만인 1981년 독립하여 개인 공방을 차렸다. 그러나 곧 기술만으로 작업을 하는 것에 한꼐를 느꼈고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있었던 최순우를 찾아가 전통 가구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매진하였고, 그 장인정신과 솜씨가 알려져 청와대 영부인실 및 운현궁 등에 박명배의 작품이 놓이게 된다. 또한 로마교황청박물관 내 한국관 가구뿐 아니라 LA한국문화원, 워싱턴한국문화원, 베를린한국문화원 등에 있는 전통가구도 만들게 되었다. 1989년 동아공예대전에 목리반을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전승광예대전에 의거리를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4월 22일 중요무형문화재 소목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1994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소목반에서 가르치는 일도 하고있다.
◇ 이수자 : 홍훈표, 이만식
◇ 전수생 : 방석호, 김형철, 송유훈, 송영도, 정재훈, 박병하

 

 

 

●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목가구나 건조물에 붙여서 결합부분을 보강하거나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총칭하여 장석(裝錫)이라고 하며,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황동(놋쇠)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두석장(豆錫匠)이라고 부른다. 두석장이라는 용어는 『경국대전』 공조(工曹)의 경공장(京工匠) 가운데 포함된 두석장에서 연유한다. 장석재료로는 황동과 백동이 주류를 이루는데 일반적으로 황동이 쓰이며 보다 고급의 장석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백동을 쓴다. 장석의 종류로는 부착하는 물건에 따라 농장석, 궤장석, 의걸이장석, 벼락닫이장석, 모반장석, 전통장석 등이 있다.

 

◇ 보유자 : 박문열
1950년 10월 1일에 경주시 황성동에서 태어났다. 1957년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금양초등학교를 다녔다. 1965년 15세에 용산에 있는 <삼흥주물공장>에 들어갔고 17살에는 삼척에 있는 <동양시멘트공장>주물부수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생계가 어려웠기 때문에 1968년 누나의 소개로 윤희복이 운영하는 장석공방에 들어가 도제식으로 일을 배우게 된다. 그곳은 고가수 보수업도 겸했기 때문에 가구에 관해서도 익힐 수 있었다. 3년 뒤 한남동에 고가수 수리업을 겸하는 자신의 공방을 낸다. 그러나 가게에 화재가 났고 모두 전소되어 윤희복 선생의 아들이 운영하는 <광명당>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수년 후에 어렵게 다시 독립하게 된다. 박문열은 항상 손으로 만든 장석과 기계로 만든 장석은 미감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고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작업을 했다. 1987년부터는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여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후 주위의 권유로 자물쇠를 출품하기 위해 경남 진주<태정박물관>에 가서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 그 때 기억해 둔 것을 서울로 돌아와 작업하여 10일 만에 완성하였다. 1993년엔 전통적인 비밀 자물쇠를 종류별로 한 벌씩 제작하여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였고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는다. 2000년 7월 22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 64호 두석장 보유자로 인정받아 활동하고 있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며,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만든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고,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 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탕건은 우리나라의 말총이 대부분 제주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탕건은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으로 분류된다. 모두 형태는 같으나 겹으로 또는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바둑탕건은 사각무늬를 놓은 것인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된 것이다.

 

◇ 보유자 : 김혜정
1946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제주도에 사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10살 무렵 탕건청에 모여 탕건짜는 기술을 익히기 시작하는데 명예보유자 김공춘의 딸인 김혜정도 10세 전후에 어머니로부터 탕건짜는 기술을 배웠다. 1987년 탕건장 전수교육조교로 지정 되었고, 2009년 어머니 김공춘이 명예보유자로 인정되면서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 되었다. 같은 해에 탐라문화제 시연과 부천무형문화유산엑스포 보유자작품전에 출품하였다.
◇ 이수자 : 김경희 / 전수생 : 김선이

 

 


●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성행하였다.
유기의 종류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이 있다. 방짜유기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 같이 둥근 놋쇠 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명이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로 만드는 방식으로, 징이나 꽹과리, 식기, 놋대야 등을 만든다. 주물유기는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원하는 기물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안성의 맞춤유기는 ‘안성맞춤’이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다. 유기장은 지역별로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하였고, 실용성이 높아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금속공예기술이다.


◇ 보유자 : 김수영
1949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김수영은 제 1대 기능보유자인 김근수의 아들이다. 20대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와 40여 년 동안 유기업에 종사하면서 기능을 계승하였고 1990년에 유기장 전수교육조교 와 1991년 경기도 우수공예기능인 지정되었다. 2006년 소상공인 대통령상 수상하였고 부질작업, 가질 작업, 땜 작업 등 유기제작과정의 탁월한 기량과 이론적 지식을 인정받아 2008년 8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 유기장 주물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으며 아버지의 뒤를 잇게 된다.
◇ 전수생 : 김범진


 

●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옹기는 식기·솥 등 그릇으로 사용되어 그만큼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신라시대에는 기와와 그릇을 굽는 일을 관장한 와기전(瓦器典)을 두고 관원을 두었다. 조선시대에도 경공장의 옹기장이 100여 명이 있었다. 전통적인 옹기는 자기와 쌍벽을 이루는 민요기(民窯器)로서 사회적 계급의 귀천을 막론하고 함께 애용했다. 다른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가마의 온도 맞추기, 유약처리 등이 가장 중요하며, 가마의 땔감으로는 오랜 시간 제 온도를 유지하는 소나무 장작을 쓴다. 옹기장은 생활용기로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계승되어 왔고, 현대에까지 쓰임이 많은 공예기술이다.

 

◇ 보유자 : 김일만
김일만은 1941년 12월 13일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양복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운용이 옹기를 건조하거나 뒷일을 돕는 건아꾼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생활했다고 한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강화도와 안성을 거쳐 장호원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옹기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비꾼부터 시작하여, 생질꾼, 건아꾼이 되었다. 18세에는 여주군 이포리로 옮겨 건아꾼을 일하며 물레질 연습도 시작하였다. 25살에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으로 이주하여 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37세에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에 자신의 옹기점을 설립한다. 1980년 12월 2일에 여주군 금사면 궁리로 이주하면서 옹기점을 두 곳으로 확장하여 운영할 정도로 번창하지만 내부사정으로 인해 다시 한곳으로 정리했다. 1989년부터는 옹기점 운영이 어려워져 가족운영체계로 바꿨는데 1990년 방송에 소개된 것을 계기로 운영에 활기를 띈다. 옹기점 명칭도 본래 <금사토기>였으나 <오부자 옹기>로 개칭한다. 2002년 10월 5일 김일만이 사용하는 질가마와 통가마가 경기도 민속자료 11호로 지정되고 11월 15일에는 김일만이 경기도 무형문화재 옹기장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0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 이수자 : 김창호 / 전수생 : 김명훈

 

 

 

 

글/사진 : 김보미 기자

국립무형유산원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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