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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 이야기

[국내리포트]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행사 - 2주차

  •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3-11-26 조회수5969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행사 - 2주차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과 (사)무형유산진흥센터는10월 11일 부터 27일 까지 3주 동안 매주 금,토,일에 걸쳐 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 공개행사를 진행하였다. 이번 합동 공개행사는 세계 최초 무형문화유산 복합문화공관인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에는 가야금산조 및 병창과 진주검무 등의 예능 분야를 포함하여, 유기장·옹기장·탕건장 등 16개 공예 분야를 진행하였다. 예향 전주의 높고 푸른 가을하늘과 함께 즐기는 무형유산 나들이를 나눠서 소개하겠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모시는 오랫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일명 저포·저치라고도 하며, 모시나무가지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것을 재료로 한다. 통일신라 경문왕 때 당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시는 습도가 모자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더위에도 통풍이 안되는 움집에서 짜야 하고, 바람이 불거나 비오는 날에는 일을 할 수가 없는 등 그 재배방식과 제작기술이 무척 힘들다. 한산모시는 한산에서 만드는 모시로,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서 품질이 우수하며, 섬세하고 단아하여 모시의 대명사로 불리어 왔다.


◇ 보유자 : 방연옥

1928년 9월 9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교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순철이 세모시 즉 고운모시를 짜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모시 짜는 과정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가 모시 짜는법을 알려주었고 16세에 처음으로 1필을 완성한다. 1948년 21세에 한산면에 살던 김기태와 결혼을 하고 시댁으로 옮긴 후 남편이 친정집의 토굴을 참고하여 만들어준 토굴과 베틀에서 모시 짜는 작업을 계속 하였다. 솜씨가 소문이 나서 먼 곳에서도 모시를 맡기러 왔다고 한다. 1967년 1월 16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 14호 한산모시 짜기 보유자 인정을 받게 된다. 현재 건강상의 이유로 작업을 하지 못하지만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힘써 온 업적을 인정받아 2008년 10월 23일 명예보유자로 인정된다.
◇ 이수자 : 황선희

 

 

 

●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궁시장이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활을 만드는 사람을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시장(矢匠)이라 한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활제작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기교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고구려 활의 형태는 벽화에서 볼 수 있는데, 현재 사용하는 국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한국의 전통 활은 이때부터 변함없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활을 만드는 재료로는 대나무, 뽕나무, 물소뿔, 소의 힘줄이 있는데, 한국의 활은 쇠뿔과 쇠심줄을 사용한 각궁(角弓)이란 점이 특징이며, 화살이 멀리 나가는 강궁(强弓)에 속한다.

 

◇ 보유자 : 박호준
1944년 인천에서 태어난 박호준은 조부인 박희원과 부친 박상준이 모두 화살을 만들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화살 제조에 참여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본격적으로 부친의 가업을 계승하였다. 1978년 2월 23일 부친이 보유자로 지정된 후 전수 장학생으로 선정되고 1982년 4월 1일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 2001년 부친 박상준이 사망하자 현재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동에서 가업을 계승하여 제시업에 종사하고 있다. 2008년 5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궁시장 보유자로 인정받는다.
◇ 이수자 : 박주동 / 전수생 : 박주봉

 

 


●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단청은 청·적·황·백·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하여 궁궐·사찰·사원 등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승려인 경우에는 화승(畵僧), 불화에 숙달된 승려는 금어(金魚), 단순한 단청장은 어장(魚杖)이라고도 일컬었다. 우리나라 단청은 삼국시대의 고분 등에서 기원을 살필 수 있고, 불교의 수용과 함께 더욱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청은 목재의 보존과 목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표면도장에 활용될 수 있으며, 위엄과 신성함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건축에 많이 이용된다. 단청은 불교나 유교가 성행했던 한국·중국·일본에서 유행했으나, 오늘날까지 단청문화의 전통이 계승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 보유자 : 홍창원

서울 신촌에서 태어났으며 불심이 깊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불교와 가까웠다. 집 근청에 위치한 봉원사에서 만봉 이치호스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15세에 단청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스승의 그림을 어깨 너머로 보고 따라하는 수준이었지만 재미가 붙어 밤낮으로 노력하였다. 이후에는 서울 보문사 일주문 단청을 시작으로 만봉스님과 함께 전국을 돌며 일했고 1981년 만봉스님의 전수 장학생, 1986년에는 이수자가 됐다. 문화재수리보수 단청기술자이기도 한 홍창원은 창경궁 문정전, 경복궁 경회루·강녕전·교태전, 덕수궁 중화전, 경복궁 근정전등을 도맡아 이름을 알렸고 2009년 2월 스승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이 됐다. 전통건축물과 오대궁 의정전, 남대문, 사당, 서원 ,중국, 일본, 몽골 등의 단청을 재현하여 단청문양을 정리하고 체계화 하는 작업을 했다.
◇ 전수생 : 홍보라

 

 

 

●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망건은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총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머리띠이다. 망건은 윗부분을 졸라매는 당(살춤), 아랫부분을 졸라매는 편자(선단), 그물처럼 얽혀져 이마부분을 감싸 앞·뒤통수를 싸매는 뒤로 구성된다. 이 밖에 계급을 표시하거나 장식하기 위해 관자와 풍잠을 메달기도 한다. 망건의 재료로는 처음에는 명주실로 만들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말의 꼬리털이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용했다. 19세기 망건의 명산지는 대구, 공주, 석성, 평양 등지라고 기록되어있으나, 최근에는 제주에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 보유자 : 강전향
1943년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서 망건 제작하는 일을 배웠다. 2004,05,07년 전성공예대전에 입선 하였고 2008년에는 전승공예대전 특선에 올랐다. 2009년 스승이자 어머니인 이수여 보유자가 명예보유자로 지점됨과 동시에 망건제작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제주전통학교에서 망건제작 과정 전승활동을 하고 있으며 공개행사와 전시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 이수자 : 전영인 / 전수생 : 이선아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목조각은 목재를 소재로 나무가 가진 양감과 질감을 표현하는 조각 기술이다. 재료로는 결이 아름답고 견실한 오동나무, 소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이 많이 사용되어 왔다. 한국의 목조각은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사원 건축과 불상 조각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불교 유물에 뛰어난 작품이 많다. 목조각의 제작과정은 잘 건조된 목재 위에 밑그림을 그린 뒤 필요 없는 부분을 쳐내는 걷목, 부재의 분리 및 접목, 채색, 도장 등의 작업을 거친다.


◇ 보유자 : 전기만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6.25전쟁 때 월남하여 군 복무했다. 광복 후 해주에서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목조각이 더 천성에 맞았다고 한다. 군대 제대 후 목조각으로 관광 상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일을 잠시 했지만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그러던 중 무형문화재 불화장인 석정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조선시대 목불이 좋으니 공부해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1967년 제 1회 동아공예대전에서 입선하였고 1968년 전국 기능경기대회 목공예부문 심사위원을 지냈다. 2001년 12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 목조각장으로 지정되었다.
◇ 전수교육조교 : 조병현 / 이수자 : 김석현

 

 


●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黃蜀葵)를 주재료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고려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러, 송나라 손목(孫穆)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태종때부터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원료 조달과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을 위해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 보유자 : 홍춘수
2009년 전라북도지정 문화재를 거쳐 2010년 2월 11일 중요무형문화재 한지장으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에 한지장 장용훈·홍춘수 韓紙전 <천년한지, 백년인연>을 열었다. 가업을<청웅한지>라고 이름 짓고 고령의 나이에도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다. 2011년 제 15회 전라북도 전승공예연구회 전통한지 작품전에 참여하였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기능전승자작품전에 참가하였다. 현재까지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 전수생 : 노정훈

 

 

 

 

 

글/사진 : 김보미 기자

국립무형유산원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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