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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 이야기

[국내리포트]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행사 - 3주차

  •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3-11-26 조회수6986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행사 - 3주차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과 (사)무형유산진흥센터는10월 11일 부터 27일 까지 3주 동안 매주 금,토,일에 걸쳐 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 공개행사를 진행했다. 이번 합동 공개행사는 세계 최초 무형문화유산 복합문화공관인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에는 가야금산조 및 병창과 진주검무 등의 예능 분야를 포함하여, 유기장·옹기장·탕건장 등 16개 공예 분야를 진행하였다. 예향 전주의 높고 푸른 가을하늘과 함께 즐기는 무형유산 나들이, 그 마지막 행사를 소개하겠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복중의 하나로, 원래는 햇볕, 비,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모자였으나 주로 양반의 사회적인 신분을 반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갓일은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뉜다. 총모자는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갓 대우 부분을 말꼬리털 또는 목덜미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을 가리키며, 양태는 대나무를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개서 레코드판처럼 얽어내는 과정을 말한다. 입자는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해서 제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생산지를 달리하거나 따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 보유자 : 박창영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청복동 출신이다. 예천 갓 일을 4대째 이어오고 있던 집안 출신으로 중학교를 졸업 후 갓 일을 전수받았다. 도중에 아버지가 사말하여 안수봉의 갓 공장으로 들어간다. 18세에 대구로 이주하여 대규모 갓방을 운영하고 있던 <박영의갓방>에 들어가서 수장일을 배운다. 1년 정도 근무한 후 정춘모가 <입자공업사>를 세웠을 때 그곳으로 옮겼다. 1967년 4월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갓의 수료는 격감했고 생활고로 인해 1978년 다시 서울로 이주하였다. 서울에서 처음에는 판로를 찾기 힘들었지만 방송과 영화의 소품으로 활용하는 등의 방법을 찾아서 지금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였다. 1985년 문화재보호협회 이사장상을 받았고 문화재관리국장상(1988) 문예진흥원장상(1989)을 수상했다. 1986년에 규슈종합전시장에서 전통 갓 제작시연을 했고 1988년과 1989년에는 LA,2011년 핀란드 헬싱키 디자인뮤지엄에서 열린 전에 참여, 2011년 국립민속박물관 <머리부터 발끝까지>모자와 신발전 참여 및 시연. 2012년 영집궁시박물관에서 열린 공개행사 <선비의 갓 風·流·禮>에 참여했다. 또한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장품인 <철종어진>(哲宗御眞)을 참고하여 전립을 복원하는 등의 가치 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이수자 : 박형박
◇ 전수생 : 김성아

 

 

 

●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금속활자장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각종 서적을 인쇄하는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된다. 금속활자의 제작과정은 글자본만들기, 원형만들기, 주조작업, 마무리작업 등 크게 4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주조기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드는 밀랍주조기법으로 초기에 주로 쓰인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활자의 원형으로 주물틀을 만든 후 찍는 모래주조기법으로 조선시대 초조갑인자 이후 보편화된 방법이다.
금속활자는 글씨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과학과 기술을 총망라하여 만들어낸 종합예술품으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전통공예기술이다.


◇ 보유자 : 임인호
충북 괴산군 영풍면에서 태어났다. 1984년에 서각에 입문하였고 3년이 지난 1987년부터 신영창에게 정식으로 배웠다. 1992년 자신의 고향에 스승의 호를 딴 <무설조각실>을 차렸다. 그리고 1997년 10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인 오국진의 제자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금속활자를 배웠다. 그 후 7년을 꼬박 조각칼과 쇳물, 활자와 씨름하여 2004년 3월 금속활자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된다. 오국진을 도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복원에 힘을 보탰고 오국진이 사망한 뒤 2009년 12월 3일 제2대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2007년부터 조선시대 주요 활자 복원을 시작하여 계미자와 경자자, 병진자, 한구자, 율곡전서자 등 금속활자 30종과 동국정 운자, 인경목활자 등 목활자 8종의 복원에 성공했다. 또한 <직지>의 상·하권 3만 자 가운데 5천여 자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 전수생 : 임규헌, 유미숙

 

 

 

●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윤도장(輪圖匠)은 24방위를 원으로 그려 넣은 풍수 지남침(指南針)을 제작하는 장인이다. 윤도는 남북방향을 가리키는 자석바늘을 이용하여 지관이 풍수를 알아볼 때나 천문과 여행분야에서 사용되는 필수도구이다. 명칭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문헌에 처음 나오고, 일명 나침반, 지남철, 지남반, 패철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풍수지남침이 신라 후기부터 발달하였고, 고려 전기에는 풍수음양지리와 연결되어 땅의 형세를 보는 풍수가나 지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구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부터는 풍수가의 전용물에서 벗어나 여행자들도 사용하였으며, 특히 천문학자들에게는 휴대용 해시계에 정확한 남북을 가리키는 자오선을 정하는데 필수적이었다.


◇ 보유자 : 김종대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마을 출신이다. 백부가 윤도를 제작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1963년 군 제대 후 윤도일과 작업도구를 백부로부터 물려받았지만 기술전수를 받지 못했지 때문에 혼자 일을 시작할 수 없었고, 다른 일과 병행하며 틈틈이 사촌형에게서 윤도 제작을 배웠다. 약 2년 후 윤도 제작의 세세한 과정까지 익힐 수 있었고 윤도는 낙산마을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평생 마을을 떠나지 않고 윤도를 제작하며 3대째 윤도 제작의 기법을 이어 명맥을 유지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1996년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윤도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 전수교육조교 : 김희수

 

 

 


●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화혜장이란 전통 신을 만드는 장인으로, 조선시대 신목이 있는 신발인 화(靴)를 제작하는 ‘화장(靴匠)’과 신목이 없는 신발인 혜(鞋)를 제작하는 ‘혜장(鞋匠)’을 통칭한 것이다.
전통 신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이루어질 만큼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완성된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청에 소속된 화혜장의 수도 많았으며, 이러한 장인 및 신과 관련된 각종 문헌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당시 생활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혜장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제작기술에 대한 학술적 연구 가치도 크다.


◇ 보유자 : 황해봉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이후 어깨너머로 할아버지의 작업 모습을 보며 자라왔다. 1973년 군 제대 후부터 할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40년을 전통 신 제작 일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 황해봉의 선대는 화장 할아버지 황한갑 뿐 아니라 고조 알아버지 황종수를 비롯하여 증조할아버지 황의섭, 증백조부인 황인섭과 부친인 황등용까지 이어지는 5대의 화장 가문이다. 수요가 많지 않았던 1970년대 초반에는 박물관이 주요 판로였으며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 즈음이 가장 호황기였다고 한다. 차츰 수를 놓아 장식한 수혜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수를 수놓는 장인에게 부탁하여 꽃신이라는 명칭으로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전에는 갖신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통을 잇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생계 때문에 일을 잠시 놓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통신 제작가문에서 나고 자랐던 본인만이 이 작업을 계승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상명감과 책임감으로 화혜를 제작해 왔다. ‘화’ 와 ‘혜’를 비롯한 거의 모든 전통신을 제작할 수 있는 기량을 갖고 있으며 2004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 화혜장부문의 ‘혜’제작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 이수자 : 황덕진
◇ 전수생 : 김미정

 

 

 

 

●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

 


불화는 불탑(佛塔), 불상(佛像) 등과 함께 불교의 신앙 대상이며, 그 제작 형태에 따라 탱화[幀畵], 경화(經畵), 벽화(壁畵)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사찰에 전해오는 탱화는 불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단청과 불화는 제작 목적과 표현방법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단청은 궁궐·사찰·사원 등의 건축물 벽면에 여러가지 기하학적인 문양과 그림을 그려 장엄하는 반면, 불화는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예배용·교화용 탱화 제작을 주로 하고 있다. 그동안 불화 제작기능은 단청장 보유자에 의해 전승되어 왔으나 종목의 특성을 고려해 단일종목으로 분리, 2008년에 불화장으로 지정하였다.


◇ 보유자 : 임석환
소년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수덕사>를 다니며 불화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20세 되던 해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와 <진관사>에 적을 두고 있던 불교미술의 대가 혜각스님을 만나 불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혜각스님을 따라 전국의 사찰을 다니며 단청을 배웠으며 공동작업으로 조성되는 불화였음에도 다른 동료들이 잠들면 혼자 나와 밤새도록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런 정성으로 인해 경남 하동 <쌍계사>에 적을 두고 계셨던 혜암스님의 제안으로 쌍꼐사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연습을 할 수 있었다. 2007년 대한불교 조계종 성보위원이었으며 2009년 한국전통문화학교 공예학과에서 단청을 가르쳤다. 2006년 1월 10일 중요무형문화재 불화장 전승기능보유자로 지정받는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에 해마다 참여하였다.
◇ 전수교육조교 : 이경아
◇ 이수자 : 오영순, 이일진
◇ 전수생 : 정일오, 이주현

 

 

 

 

글/사진 : 김보미기자

국립무형유산원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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