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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 이야기

이달의 인간문화재 아카이브 컬렉션ㅣ태평무 보유자 故 강선영의 여권

  • 작성자임지혜 등록일2018-03-05 조회수2681

 

태평무 보유자 故 강선영의 여권

조사연구기록과 노희진​

 

태평무 보유자 故 강선영의 여권 사진

 

 

국가의 허가 없이는 바다 한쪽 함부로 건널 수 없었던 시절 , 여권에 몸무게까지 적혀있던 1960 년대였다 . 그녀는 그 작은 몸으로 수십 명의 무용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누볐고 , 그 모든 흔적은 3 권의 여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 나라의 안녕과 민족의 태평성대를 위한 춤 태평무 . 국가무형문화재 제 92 호 태평무 강선영 ( 姜善泳 ) 보유자의 본명은 봄을 담은 강춘자 ( 姜春子 ) 였다 . 3 월에 태어난 그와 꼭 맞는 이름이었다 .

 

강춘자와 강선영은 무엇이 다릅니까 ?”

강춘자는 태어난거고 , 부모한테 받은 이름이고 , 강선영은 우리 남편이 지어준 거고 ( 내가 춤추는 걸 ) 그 싫어하면서도 그걸 지어주고 돌아갔다는거 , 거기에 인저 그냥 모든 감사를 다 하는 거죠

지금까지 선생님을 지켜온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강선영이죠 . 이름 석 자죠 . 이름 석자가 죽이고 살리고 했으니까 . 이름 석자죠 . 그래 이 석 자를 얼마만큼 깨끗하게 갈 때까지 가지고 가느냐 저는 그게 연구에요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2008, 구술로 만나는 한국예술사 : 강선영 , 중에서

그는 일생동안 170 여 개국 1,500여 회 이상의 해외공연에 참여했으며 , 한국전통무용 최초로 뉴욕 링컨센터에서 태평무 공연을 이뤄냈다 .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 속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해외공연에 나섰고 ,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춤 인생 80 년을 기념한 본인 공연의 총괄 안무와 예술감독을 맡았다 . 무용인으로서 , 때로는 제자들을 책임진 단장으로서 , 예총회장이자 국회의원으로서 , 그리고 인간문화재로서 강선영 이라는 이름 앞에 언제나 당당한 삶을 살았다 . 강춘자와 강선영이 함께 담겨있는 이 3 권의 여권은 그의 솔직한 발자국이자 , 그가 지키고자 했던 삶의 기록이다 .

 

이 자료는 2016.6 강선영의 딸이자 태평무보존회 이사장인 김남복 씨가 태평무전수회관 ( 경기도 안성 ), 자택과 태평무 보존회 사무실 ( 서울특별시 성북구 ) 등에 보관 중이던 사진 , 의상 , 소품 등 494 건과 함께 국립무형유산원에 기증되었다 .

 

명가 강선영 ( 姜善泳 , 1925~2016)

15 세에 명고수이자 조선 춤의 대가인 한성준 ( 韓成俊 ) 문하에 입문하여 태평무 」 「 승무 」 「 살풀이춤 」 「 학춤 」 「 한량무 」 「 즉흥무 등을 전수받았다 . 1960~70 년대에는 목란장군 」「 열두무녀도 」「 초혼 」「 원효대사 」「 수로부인 」「 황진이 등 민족문화의 원형탐색에 기반한 전통의 재창조 작업에 몰두하여 한국창작춤의 미학적 진화를 주도했다 .

1988 년 강선영 태평무 가 국가무형문화재 제 92 호로 지정되면서 인간문화재 반열에 올랐다 .

1998 년 안성에 태평무 전수관을 설립 , 전통춤의 보급과 지역문화 활성화에 힘썼다 .

1940 년 부민관에서 데뷔무대를 가진 이래 지금까지 170 여 개국에서 1,500 여 회가 넘는 공연활동을 통해 한국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무대에 알렸다 .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 14 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1992 춤의 해 선정 , 무용콩쿠르 수상자의 군 ( ) 면제 등 춤사회의 주요현안을 정책적으로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 한국춤의 발전과 문화예술계에 헌신한 공로로 서울시문화상 , 국민훈장 목련장 , 대한민국 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 태평무에 대한 상세정보는 무형유산 디지털 아카이브 서비스에서 이용할 수 있다 . (http://iha.go.kr/main/ArchiveType/getTreasureTypeView.nihc?classid=109)

( 참고문헌 : 성기숙 , 2008, 태평무 인간문화재 강선영 , 서울 ; 연낙재 )

 

태평무 보유자 故 강선영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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