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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 이야기

[국내리포트] 누가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안한다고 했나?

  •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2-11-23 조회수7841

 

 


<평안감사 월야선유도, 김홍도>

평양으로 부임해온 평안감사를 맞이하는 축제가 야간에 대동강에서 화려하게 이뤄지고 있다.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본인이 싫다면 억지로 시키기 힘들다는 의미다. 그런데 속담에서 하필이면 평안감사를 예로 들었을까? 평안 감사가 얼마나 멋진 자리였으면 이렇게 속담으로 남아 우리네의 한 정서를 담고 있는 것일까. 언뜻 생각하면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감사가 더 매력적이었을 법 하지만 평안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멋진 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조선 초기(1413년, 태종 13년)에 전국을 팔도로 나눴을 때, 관서지방을 평안도라고 지칭했다. 각 도를 다스리는 지방장관을 관찰사 또는 감사라고 했으며, 평안감사의 감영이 평양에 위치해 있어 속담처럼 평양감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역사가 말해주는 명당, 평양
평양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고조선, 위만조선, 삼국시대를 이어오면서 중요한 거점이었고, 고구려 때는 수도이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도 평양은 서경이라고 하여 한 때 서경천도를 생각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평양은 한반도 북쪽의 중심으로 역사 속에서 서울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곳이었다.

 

 


<개성고지도>

고려 왕궁 터 만월대(滿月臺) 바로 뒤에 부소산(扶蘇山), 그 뒤로 송악산(松岳山)이 있고, 만월대 바로 옆 서편으로 광명동(廣明洞)과 곡령(鵠嶺)이 보인다. 부소산(扶蘇山)은 고려 태조의 외 6대조 호경(虎景)이 처음 개성에 터를 잡아 살던 곳이다. 송악산 뒤 계봉(鷄峰) 너머에 태조의 조부 작제건(作帝建)의 옛집터(古基)가 있다. 곡령(鵠嶺) 너머 서쪽으로 태조릉(王太祖陵)도 보인다.

 

야심가에게 인기 좋은 평양
평안도는 중국과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나 상인들은 대부분 평양을 통과했어야 했다. 당시 조선시대에 조선 시대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라가 중국이었다.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 국립중앙박물관소장

 

 

평안 감사를 지내면 이곳에서 유력한 권력가를 만날 수도 있고, 중국과의 경계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도 상당했다. 한편, 평안도 지역은 높은 역할의 비중에도 불구하고 과거 급제자나 높은 벼슬을 역임한 실력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당시에는 영남이나 호남같이 특정한 학파에 의해 지역적으로 구분되어 그들의 선호지역과 활동무대는 학파에 의해 정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평안도는 이들의 학파에 의한 인맥의 힘이 크지 않으니 지방 장관으로서는 호족의 눈치를 덜 보고 실리를 취할 수 있는 지역이라 더욱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경국지색이 넘쳐나는 색향, 평양
평양은 미인이 많은 색향으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조선 시대에는 관기라고 하여 각 관청마다 기생인, 여악이 있었었는데, 그 중 평양기생은 단연 으뜸이었다.

어떤 음악과 춤을 연주했을까?
조선의 선상기제도를 살펴보면 이를 추정할 수 있는데, 선상기 제도란 중앙에서 각 지방 감영에 공문을 보내 뛰어난 여악을 선출하여 국가의 큰 행사에 참여 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때 평안도와 경상도 감영에서 가장 많이 여악이 선발되었는데, 이들은 중앙에서 활동하던 ‘경기(京妓)’의 기녀들과 중앙의 연향에 참석하고 다시 자신이 속해 있던 관아로 돌아간다. 이를 통해 궁중 정재가 지방과 민간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가게 되고, 중앙 역시 지역과 민간의 춤과 음악에 영향을 받게 된다. 서로의 고급문화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며, 수준 높은 평안도의 문화와 중앙과의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선상기 제도를 통해 당시 평안도에서 연행되었을 춤과 음악을 살필 수 있다.

 

 


<부벽루연회도>

조선시대, 김홍도


또한, 김홍도의 그림‘부벽루연회도’에서도 당시의 음악문화를 찾을 수 있다.
김홍도는 여러 풍속화를 통해 우리의 문화를 찾아 볼 수 있는 작품을 남겼다. 부벽루는 전국의 이름난 누각 가운데 평양의 빼어난 경치로 손꼽히는 누각인데, 이 그림에서 여악들의 춤사위를 찾아볼 수 있다. 큰 북을 중앙에 놓고 여기들이 추는 춤은 무고, 칼을 들고 두 사람이 추는 검무, 처용의 탈을 쓰고 오방색의 의복을 갖춰 입고 추는 처용무, 그림 속 평안감사 바로 앞에서 천년만세를 기원하며 선도(仙桃)를 바치며 추는 헌선도가 바로 당시 평안도에서 연행되던 춤사위인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에서 찾아보는 평안지방의 음악
춤인 정재는 중앙과의 활발한 교류로 큰 변모가 없이 연행되지만, 평안도 지역의 음악은 그 지역의 방언과 정서 그리고 문화적 특징의 차이로 인한 음악의 시김새와 음색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어지며 오늘날까지 뚜렷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어 이북지역의 음악을 쉽게 연구하기 어려워도 다행이 예부터 평안도 및 황해도 지방에서 불리는 민요와 잡가, 시창이 전승되어오고 있다. 1969년 지정된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예능보유자로는 이은관, 이춘목, 김광숙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보유자 김광숙, 이은관,이춘목(사진순)

 


서도소리의 대표곡으로는〈수심가〉가 있다. 이른바 '수심가목' 또는 '수심가조'이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창법은 콧소리로 얕게 탈탈거리며 떨거나, 큰 소리로 길게 뻗다가 갑자기 속소리로 가만히 떠는 방법 등으로, 애절한 느낌을 준다. 서도소리는 다른 지역의 민요와는 달리 기악반주를 가진 것이 거의 없고 채보(採譜)된 것도 드물다. 그 이유는 이북지역의 방언과 같이 서도민요 특유의 미묘한 장식음이 큰 특징인데 바로 이 창법이 채보의 어려움의 한 이유가 된다. 서도소리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감성과 풍부한 표현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큰 특징이기도 하다.

 

이래도 평안감사가 싫다고 했겠는가.
‘평안감사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의 속내를 드려다 보면, 호사가들에 의한 평안감사 자리에 대한 부러운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에서 유래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평안도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역사적, 지리적 그리고 권력의 중심지, 무엇보다 수려한 풍광과 끼와 재능이 넘쳐나 풍성한 문화가 남아 있는 평안도.
제 싫어 안한 평안감사는 이곳의 풍류를 제대로 알았다면,

이래도 평안감사가 싫다고 했겠는가.

 

국립무형유산원 기자단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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