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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 이야기

[국내리포트] 한산의 여인이 만드는 가장 한국적인 옷감(衣料). 세모시

  •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2-12-07 조회수4910

한산의 여인이 만드는 가장 한국적인 옷감(衣料). 세모시
               중요무형문화재 14호 한산 모시 짜기 방연옥 보유자를 만나다.

 

 

 모시, 저마포(苧麻布)
 2011년 겨울. 택견, 줄다리기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전통무형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한산모시짜기가 그것, 모시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한다.  <三國志>,와 <中國精査朝鮮典>등에서 그에 관한 짦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모시를 다른 이름으로 저마포라고 하는데 고려, 조선시대 왕이 내전(內殿)에 머물 때의 평상복을 만드는 옷감으로 진상 되었다. 중국에서도 그 명성이 대단하여 조선시대에는 인삼과 더불어 명, 청 황실에 보내는 주요 공물이자 교역(交易)품으로 국외 사랑받은 직물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값싼 화학섬유의 등장으로 판매가 어려워지며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모시날기의 모습

 

모시짜기, 침이 석 되는 있어야 모시한필.
 모시의 제작은 모시풀의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재기, 날기, 째기 등 9가지 과정을 거친 뒤에야 배틀 걸고 짜게 된다. 가늘고 섬세하여 모시 한필을 짜는 실이 사발하나에 들어갈 정도다. 모시는 실의 굵기에 따라 그 등급을 매기고 그 종류가 구분되게 되는데 가는 실로 짜는 것은 저마(苧麻)포 모시, 굵은 실로 짜는 것을 대마(大麻)포 삼베다. 보통의 모시옷하며 까끌거림을 생각 하는데 저마포 모시 그 곱고 정밀하기가 비단 못지않다.

 

 

시골 아낙, 무형문화재 되다.
 방연옥 선생님을 처음 만난 곳은 기자가 다니고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의 직조실 이었다. 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신 방 선생님의 첫인상은 작은 키에 시골 할머니였다. 그곳에서는 춘포 짜기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잠깐 소개를 하자면 춘포는 모시실과 견사(비단실)를 섞어 만드는 직물이다. 한 창 진행 중인 강의가 끝나고 오후가 되어서야 인터뷰를 시작 할 수 있었다. 모시 일을 어떻게 배우게 되셨는지가 궁금하여 물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모시 짜는 것이 신기해서 그걸 입에다 물어보기도 하고 무릎에 비벼도 봤어요. 그때 재대로 배우지는 못했어요. 어머니께서 짜고 메고 하는 것은 대물림 안한다고 안 가르쳐주셨거든요. 그러다 나이가 되어 한산으로 시집을 갔어요.”

 

 방 선생님의 어머니는 딸에게 모시를 가르치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 잊고 지내다가 시집을 가고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우연히 동네 아주머니 한분을 통해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모시 일을 시작하시게 된다.

 

“ 처음에는 같은 동네 아줌마 한분이 모시 일을 도와 달라 하셔서 조금씩 돕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중요무형문화재 선생님 故문정옥이셨어요. 본격적으로 막내아이가 세 살 되던 무렵부터 전수 장학생으로 들어가 배우기 시작 했어요.”
 
  재능을 알아본 故문정옥 선생에게서 모시 짜기를 사사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한산의 모시 짜는 방식은 옛 전통여서 바람만 불어도 실이 날라 가고, 조금만 습기가 많아도 짜던 실이 끊어지고 상하기 쉽상 이다. 무릎에 비빌 때면 가는 실에 베이기도 하고 이로 실을 가늘게 정련하다 보면 이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늦은 나이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봐가면서 배워야 하는 모시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힘든 와중에 왜 그만두지 않고 일을 계속 하셨을까?. 

 

 “배우다 보니 배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우리 어머니가 이래서 안 가르쳐주셨을 것 같더라 구요. 울기도 많이 울고 포기 하려고 했어요. 그런대 생각해 보니 어렵다고 안 배우고 쉽다고 배우고 이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내가 하지 않으면 없어질 것 같았어요. 전통을 이어가고 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대를 이어가고 싶었어요.”

 

 

 단절된 전통, 바디장, 그리고 사라진 보름새 모시
 모시 중에서 가장 고급 모시는 보름새 모시라고 한다. 앞서 소개한 저마포가 바로 보름새 모시이다. 그러나 지금은 짤 수 없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일까?.

 

 

전통적인 나무바디의 모습

 

“지금의 모시 틀, 손베틀로는 보름새 모시를 못 짜요. 예전에 어르신(故 바디장 구진갑)이 만들던 것을 잘 보존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가 오래 사실 줄 알고 또 새로 나온 바디로만 짤 줄 알아서 어르신이 돌아가신 뒤에 다 걸리적거린다고 없애버렸대요. 그래서 지금 바디가 없어요. 선생님이 사시고 전수자만 있었어도 전통이 단절 되지 않았을 것 인대 안타까운 일이죠. 지금은 그보다 적은 10새 12새 정도의 모시는 만들 수 있어요.”

 

 故구진갑 옹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8호 바디장으로 베틀의 부속인 바디를 만들던 장인이다. 그가 죽자 전수자가 없는 그의 기술도 같이 죽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의 바디는 쇠로 만들어진 바디를 사용하는데. 바디의 품질이 균일할지는 몰라도 나무 바디에 비해 탄성과 질이 떨어져 곱고 좋은 모시를 만들기는 어렵다. 모시를 짜는 기술은 있는데 도구가 없어 만들지 못한다니 말이다. 무형유산이 하나 사라짐으로서 우리의 문화예술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샘이다.

 

 인터뷰를 마치기 무섭게 다시 학생들을 지도 하시는 방연옥 무형문화재 그녀의 작은 등에서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친절함에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그리고 한산 세모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을 느껴졌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적인 여인의 모습들 중 한 가지를 꼽자면 한 여름 모시 적삼을 곱게 입고 쥘부채를 든 모습이 생각난다. 그 모시 적삼의 아름다움은 밤새 손이 트고 입이 마르며 짠 세모시 덕분이다. 이런 세모시가 단절 되지 않고 이어 갈수 있도록 세모시 전수에 대해 고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립무형유산원 기자단  한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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