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문서위치



무형유산 이야기

[국내리포트]처용무(處容舞) -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3-12-27 조회수7578

 

 

 

 

 

 

 

 -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처용무의 기원

   

처용무는 궁중 무용으로 다섯 사람이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 옷을 제각기 입고 처용 가면을 쓴 채 추는 춤이다.

  

처용무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처용설화를 살펴보면,

처용은 통일 신라 시대인 9세기 후반 사람이었다.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전염병을 옮기는 귀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대범하게 춤을 춰서, 귀신을 쫓아 버린 전설상의 영웅이었다.  처용이 이때 악귀를 쫓기 위해 만든 노래가 우리 민족의 고대 시가를 대표하는 처용가이고, 덩실덩실 추었던 춤이 처용무의 기원이 된 것이다.

  

 

서울 달 밝은 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것이었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가)

    

 

이에 역신은 처용에게 이렇게 답한다.

  

 

죄를 범했는데도,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삼국유사 <처용망 망해사>  

 

 

 

이후 고려시대부터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만 보면 역신이 도망 갈 거라고 믿어, 각 집 대문에 처용그림을 붙여놓고 무사를 기원했다. 그러다가 점차 세월이 흐르며 처용무는 악귀를 몰아내는 의식을 넘어 궁중에서 하는 잔치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대표적인 궁중 무용으로 변했으며 오늘날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되어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궁중정재로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탈

 

   

 

남성춤, 처용무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처용무를 추는 춤꾼들은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었다. 청색은 동쪽, 흰색은 서쪽, 붉은색은 남쪽, 검은색은 북쪽, 노란색은 중앙을 상징한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머리 위에는 꽃과 열매가 달린 사모를 쓰고, 모두의 손에는 하얀 한삼을 끼고 춤을 춘다. 세종 때는 궁궐에서 추었던 유일한 춤이 처용무였다.

 

 

 

                                                     궁중정재 처용무                                  처용무 보유자 故 김천흥

 

   

 

 

 

처용무에 사용된 음악

처용무에 사용되었던 음악도 춤과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처용무가 궁궐의 공식 행사로 인정된 것은 조선 세종 때였다. 세종의 명령으로 윤회라는 사람이 봉황음이라는 음악을 고쳐 만들었다.

성종 때 쓰여진 조선 최고의 음악 서적인 악학궤범에는 봉황음을 비롯하여 처용무에 사용되었던 여러 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다양한 음악들이 처용무에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음악이 불교 음악인데, 영산회상, 미타찬, 관음찬 등이 처용무에 사용되기도 했다.

 

통일 신라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처용무는 1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통과 맥을 이어 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수준 높은 예술과 고유한 풍습을 중시했는지 잘 보여 주는 전통문화입니다.

 

 

김천흥 보유자

처용무의 예능을 보유하고 있는 김천흥은 조선시대의 마지막 무동으로 처용무를 이어왔다.

서울 출생으로 1926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를 마치고, 이왕직 아악부에 들어가 1932년 아악수장이 되었다. 1955년 김천흥 고전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1958년 무용극



컨텐츠 바로가기